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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
그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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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의 배후는 늘 불온하고 불안하다. 작가의 이력과 학력과 명성과 가족력과 이론과 평론과 유행이 항상 그 배경에 있다. 그리고 보드리야르가 <예술이 음모>에서 거론하듯 예술은 예술계의 회로안에서만 존재하며 그 양상은 사실상 공모이며 음모이다. 이렇듯 작품은 허약하기 짝이 없어서, 항상 그 작업 자체로만 보여지기가 힘들다.
결과, 대중은 좋은 작업을 보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작업을 보길 원한다. 대부분의 예술애호가나 컬렉터 역시 마찬가지다. 소장의 가치는 유명세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내가 가진 김창렬의 그림엔 물방울이 몇 개가 그려져있다는 식의 저급한 대화가 오가게 되는 것이다.
작가들은 어떨까? 남의 언어뒤에 비겁하게 숨어서 안위하고 있지 않나 스스로 반문해 봐야 한다. 도록의 유명 평론가의 작품 해석으로 마치 자기 작업의 가치가 상승하고 의미가 귀결된다는 착각은 하고 있지 않은가?일종의 상승작용을 내심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업이 자기언어가 아닌 남의 언어에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가는 실로 자기 평론의 글을 이해는 하고나 있는 것인가? 작가는 자기 작업을 담보로 너무 많은 양의 전당을 요구하고, 평단는 너무 후하게 보증을 서주며, 기관은 장부를 조작하고, 저널과 전시공간은 돈을 세는 재미에 빠져있다.
그렇다면 서문이나 평론은 어떠한가? 평론도 작품과 같이 분명한 예술행위이어야 한다. 한 평론글이 전시도록에 실렸다면 글이 작품의 뒤를 바쳐주는 역할이 아니라 같은 예술작품으로 동등한 경쟁관계에 있어야 맞는 것이다. 그 경쟁의 심사는 당연 읽는 이들의 것이며, 그것은 매우 흥미로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둘간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평은 전시 사후에 다른 공간이나 지면에 있어야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결론적으로, 대중은 자기 안목이 있어야 한다. 작가는 자기 언어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평은 작품과 별개로 문학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저널과 전시공간은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기획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관엔 마땅히 전문가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 역사위에서만 비로서 좋은 작가들, 존경받아 마땅한 작가들이 생기는 것이다.
17세 소녀 감성으로 한 번 써봤다. 더텍사스프로젝트 19개의 방의 짧은 전시서문이다.
꽃은 화단에서만 자라는 게 아니야. 들에도 있고 때론 절벽에서도 피지. 하지만 다 아름다워... 꽃이기 때문이야.. 우리는 오늘 여기서 꽃을 필거야... 19송이의 꽃을...
그 어느곳에나 예술이 피고 자랄 수 있음을. 가루가 되어 멀리 날아갈 수 있음을.어떤 질투도. 어떤 미움도, 그저 어울림과 아름다움뿐.. 남의 언어 뒤에서 비겁하게 숨어서 살고 싶진 않아. 철학의 도화지도, 이론의 삽화도 아니야. 그것들은 우리들의 맨 얼굴이고 정신의 맨 꽃이 될거야. 카메라는 생각하지 않아.
꽃처럼 선명하게 현현하는 우리의 모습을 봐 줘. 세상은 가끔 아름답지만, 오늘이 그 가끔의 날이 되고 그 아름다운 날이 되길. 우리 여기 모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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